정 민 혁
신해경의 내성적인 사이키델리아부터, 데프헤븐(Deafheaven)의 휘몰아치는 파토스까지. 밴드 라쿠나의기타리스트로만 알고 있었던 정민혁의 솔로 데뷔 앨범 ‘도서대여점’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다. 이 음반은, 셀로판 구름 위를 둥실 떠다니는 듯한 드림 팝의 미감이 가사와 선율에 묻어나는가 하면 한 발이라도 헛디디면 빠질 듯 아찔한 청각적 소용돌이가 때로 긴장감까지도 선사한다. 라쿠나의 다른 멤버들이 입대한 사이, 홀로 남겨진 기타리스트 정민혁은 묵묵히 기타 사운드의 모래성을 쌓아간 셈이다. 그 성은 다행히 정민혁의 폴더 속에 갇혀 있거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았고 5곡이 꼭꼭 담긴 미니앨범(EP)이 돼서 세상에 나왔다.
혼자가 된 정민혁을 최근 서울 마포구의 소속사 엠피엠지 뮤직 사무실에서 만났다. 수줍은 웃음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정민혁은 ‘도서대여점’을 휘감은 서릿발 같은 기타 사운드만큼이나 단단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임희윤 음악평론가
라쿠나의 정민혁이 아니라 이제 '그냥' 정민혁이군요. 첫 솔로 앨범을 어떤 계기로 내게 되셨어요?
정민혁 : 라쿠나 밴드 활동을 하면서도 일종의 취미 생활로 제 솔로 곡을 이따금씩 사운드 클라우드에 몇 번 올렸었어요. 이를테면 EP 마지막 곡 '그늘 아래'는 2021년쯤에 쓴 곡이죠. 마침 멤버들 가운데 저만 군대에 가지 않게 돼서, 처음엔 이참에 솔로 싱글이나 몇 개 내볼까 했어요. 그러다 점점 일이 커졌네요. 3번 곡 '날씨는 흐림'이 가장 나중에 써서 추가한 곡인데 올해 2월에 만든 곡이에요.
기타리스트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보컬로도 전면에 나서는 건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정민혁 : '그늘 아래'란 곡이 계기가 돼줬어요.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그냥 기타 위주의 황홀한 곡을 써보자는 생각 정도였는데 이 곡이 '나도 노래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줬죠. 음악 활동을 오래 하다 보니 보컬 디렉팅을 보는 일도 꽤 많았거든요. 노래 연습을 꾸준히 해온 건 아니지만 그런 경험들이 그냥 제 몸에 쌓여 있었나 봐요. 해볼 만했어요.
처음 음악에 빠진 계기, 악기를 들게 된 동기가 궁금해요.
정민혁 : 중학교 1, 2학년 때부터 넬, 그린데이를 좋아했고 3학년 때부터는 친구의 권유로 기타를 시작했어요. 공부하는 것보다는 델리 스파이스, 3호선 버터플라이, 언니네 이발관 같은 국내 인디 음악을 듣는 게 훨씬 재밌었어요. 고등학교 때 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기타를 본격적으로 팠죠. 한편으론 거스리 고번, 존 메이어, 누노 베텐코트 (익스트림) 같은 기교파 기타리스트를 동경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조니 버클랜드(콜드플레이)처럼 단순한 음 몇 개만으로도 감성적 깊이를 파고 들어오는 연주를 사랑했죠. 콜드플레이의 ‘In My Place’에 나오는 것 같은 그런 라인들요.
EP의 제목, 타이틀 곡 제목이 모두 ‘도서대여점’이에요. 요즘엔 주변에서 도서 대여점을 보기 힘들어진 것 같은데, 이 키워드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또, 만약에 민혁 씨가 진짜로 도서 대여점을 운영한다면 고객들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은?
정민혁 : ‘도서대여점’이란 곡의 인트로를 만들어두고 완성하기까지 1년이 걸렸어요. 인트로가 너무 맘에 드는 만큼 소중하게 차근차근 써나가고 싶었거든요. 가사를 쓸 때쯤엔 멤버들과 떨어지게 되면서 혼자 작업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어요.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빌린다는 표현이 먼저 써졌어요. ‘마음을 빌려주는 상징적인 곳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도서 대여점이 떠올랐죠. 제가 작년부터 책을 좀 읽기 시작했거든요. 음악가 몬구(몽구스) 씨가 쓰신 ‘장르는 여름밤’이란 에세이를 읽으면서 독서의 매력에 빠졌어요. 따뜻한 책 속에서 내가 읽고 싶은 감정만 빌린다면, 하는 아이디어가 자연스레 떠오른 거죠. 제가 대여점 주인이라면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은요. 책을 즐겨 읽는 보컬 친구(라쿠나 장경민)가 권해줘서 읽게 된 ‘밤은 책이다’(이동진 저)요. 유튜브 동영상으로 치면 숏폼 같은 매력이 있었어요. 짧게 짧게 끊겨 있어서 중간부터 읽어도 이해가 잘 됐어요. 저처럼 막 독서의 매력에 빠져들고픈 분들에게 첫 책으로 추천해 주고 싶어요.
라쿠나의 사운드와 정민혁의 사운드는 다를 것 같아요. 사운드 스케이프라는 측면에서 정민혁의 솔로 앨범에서 다 르게 접근한 부분이 있다면요?
정민혁 : 라쿠나를 할 때는 일부러 비워두는 부분이 많았어요. 베이스나 드럼의 라인이 더 들어오면 좋겠다거나 다른 기타나 보컬과 어우러질 수 있는 측면들을 더 많이 고려했죠. 이번엔 혼자니까 더 과감해졌어요. 내 마음에만 들면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펙터도 많이 걸고 사운드를 겹겹이 쌓기도 했죠. 라쿠나는 곡을 쓸 때부터 공연에서 구현할 수 있는 부분을 염두에 둬야 했지만 제 솔로는 공연이 아니라 음원 제작만 생각했기 때문에 기타를 100 트랙 넘게 넣거나 기타 라인 하나를 10겹으로 쌓기도 했어요. 되레 드럼, 베이스는 기타와 보컬에 맞춰주는 식으로 넣었고요. 자주 쓰는 리버브(reverb) 이펙터군(群)에 제가 ‘구름’이란 이름을 붙여놨거든요. 왜냐면 실제로 그 상태로 기타를 치면 구름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느낌이 들어서요. 구름이 빠르게 움직일 때 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서 더 흐르게 하고, 천둥번개가 쳐야 할 때는 옥타브 이펙터로 위아래를 더 쌓아서 거칠게 표현하기도 했어요.
‘그늘 아래’에서는 거의 블랙게이즈(blackgaze) 장르로 불러도 될 만큼 격렬한 기타 사운드가 저류에 흐르는 게 들려요.
정민혁 : 슈게이즈(shoegaze)적인 사운드를 기본으로 잡고 리드 기타에는 피치 시프터(pitch shifter)를 더해서 시머 리버브(shimmer reverb)의 느낌으로 감싸버리면 황홀감을 더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작업했어요. 앨범의 여러 부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에 쓰이는 하프 소리를 넣었는데, ‘그늘 아래’의 마지막도 기타와 하프의 소리가 겹쳐지면서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으로 장식해 봤어요.
밴드 라쿠나는 동화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어요. 정민혁의 가사를 살펴보면 그늘, 기억, 흐림, 구름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오더라고요. 정민혁 세계관은 무엇인가요. 음악적으로 드 림 팝의 느낌도 있고 가사도 꿈결 같은데, 혹시 ‘꿈’인가요?
정민혁 : 제가 꿈을 자주 꾸긴 해요. 꿈속에서 하늘 위에 있다가 멜로디가 들려서 깨어나면 다급히 휴대전화 녹음기를 켜서 그 멜로디를 녹음해 두기도 해요. 심지어 예지몽도 자주 꿔서, 어떤 공연장 무대에 서는 꿈을 꾼 뒤엔 진짜 거기서 공연을 하게 된 적도 있죠. 그늘은, 제게 편안한 휴식 같은 공간이에요. 라쿠나의 동화적 세계관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정민혁의 세계는 제가 직접 꾸고 느낀 꿈으로 그린 세계가 아닐까요.
앞으로도 정민혁의 솔로 활동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음악가 로서 장기적인 목표와 꿈도 말해주세요.
정민혁 : 오랫동안 저의 직업은 기타리스트였고, 취미는 싱어송라이터였어요. 사실 음악 말고는 딱히 다른 취미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취미도 제2의 직업이 된 셈이네요. 주변에서는 솔로 활동 초기이니까 싱글을 내라는 권유를 많이 했는데, 저는 오히려 책처럼 길이가 있는 음반의 형태로 내고 싶은 마음이 강했거든요. 그냥 막 밀어붙여서 낸 앨범인 셈이죠. 라쿠나의 멤버로서도, 솔로 아티스트 정민혁으로서도 목표는 비슷한 것 같네요. 음반의 예술성을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요. 어쩌면 다음엔 좀 더 과감한 음반을 낼 수 도 있을 것 같네요.
인터뷰 | 임희윤 (음악평론가) 사진 | 민희수 (2Fyou)
디자인 | 김예지 기획 | GROI / 구자영
에디터 | 이서인 이동석 발행 | 킨디라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