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렛
2022년 가을이었나, 서울 마포구의 한 건물 2층에 자리한 소극장 네스트 나다에서 뷰렛의 20주년 공연을 봤었다. 밴드의 뜨거운 연주와 함께 보컬 문혜원은 1인 뮤지컬이라는 콘셉트 안에서 과거와 미래, 판타지와 현실 세계를 오갔다. 작은 클럽 무대 위에서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의 곡과 곡 사이를 곡예사처럼 부유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속 외계인 로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수의 콘서트라기보다는 ‘뷰렛’이라는 한 독자적 생명체의 압축된 연대기와도 같았다.
뷰렛은 그렇게 거의 사반세기 동안 서울 마포구 일대, 또는 한국의 인디 음악계를 지켰다. 여전히 생동한다. 5년여 전부터 문혜원 1인 체제가 된 뷰렛은 지난 4월 피아노 발라드 싱글 ‘늘 그랬듯이 헤어지진 마’를 냈다. 지난해에는 중국어 싱글 ‘Rock Star’를 내는가 하면 자신의 대표곡 여럿을 영어 버전으로 새로 녹음해 내놓기도 했다.
최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뷰렛의 문혜원은 내년에 10년 만의 정규 앨범이 되는 4집을 발표하려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넘치는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지, 그에게 물었다.
- 임희윤 음악평론가
거의 공통 질문인데, 처음 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혜원 : 유치원 때부터 제 노래를 만들어 불렀어요. 제가 만든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 놀이를 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피아노를 배우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꾸기도 했죠. 그렇게 막연히 지내다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러다 당시 학교 방송반에 있던 친구 하나가 저를 홍대 앞 클럽에 데려갔어요. 드럭이었죠. 크라잉넛, 노브레인, 옐로우 키친, 위퍼가 출연한 날이었죠. 이거다 싶었어요. 당장 컴필레이션 앨범 ‘Our Nation Vol. 2’를 샀고 ‘메탈 플러스’나 ‘백스테이지’ 같은 뮤직비디오 틀어주던 곳을 학교보다 더 많이 드나들었죠. 용돈 5만 원을 받으면 바로 음반점에 가서 5000원짜리 카세트테이프 10개를 사버렸어요. 그러다 대학 실용음악과에 입학을 했고 인천방송(iTV)의 리얼 드라마 ‘디비딥 밴드’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결성한 밴드가 뷰렛이죠? 20여 년 동안 유지한 뷰렛이란 브랜드, 지금 생각해도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세월이 흐르며 많은 밴드가 명멸했음에도 뷰렛이란 이름을 계속 유지하는 이유는 뭔지 궁금합니다.
혜원 : 네. 결성 직전 ‘재머스’란 클럽의 오디션에 합격한 뒤 그곳 사장님께 그룹명 후보 셋을 건넸는데 ‘여자 셋에 남자 하나이니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뷰렛 어떠냐’고 하시더라고요. 용액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화학 반응을 가리키는 ‘뷰렛 반응’도 생각났고 ‘뷰티풀 바이올렛’이란 의미도 담았죠.
사실상 멤버가 혼자인 지금까지도 저는 뷰렛이 저랑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음, 언젠가부터 피아, 장미여관, 장기하와 얼굴들 등 여러 밴드가 해체하기 시작했는데 그럴수록 알 수 없는 책임감에 나라도 이 뷰렛을 버리지 말자고 다짐했죠. 불씨를 결코 꺼뜨리지 말자고요.
밴드 뷰렛, 솔로 프로젝트 문정후, 또 문혜원.... 여러 정체성을 어떻게 다르게 관리하고 유지하시는지요.
혜원 : 사실 문정후는 뷰렛이 다인조일 때, 뷰렛과 다른 색깔의 음악을 하기 위해서 만든 이름이예요. 하지만 내년 4집을 기점으로 뷰렛을 더 이상 밴드 사운드에 국한하지 않기로 했어요. 한계 없는 음악가로 뷰렛을 상정하기로요. 이제 문정후는 역사 속으로 놔줘야겠죠?
문혜원은 배우로서, 성우로서도 활동해요. 연말에 뮤지컬 활동을 재개할 예정에 있어요. 성우로서 활동한지도 벌써 10년이 됐네요. 거의 빌런만 맡았어요. ‘또봇’의 카사장, ‘바이클론즈’의 마담 흉은 특히 정이 가는 캐릭터예요. 제가 이 록으로 다져진 그롤링(growling)도 종종 써먹거든요. 예전엔 독특한 목소리를 갖고 싶어서 일부러 목소리를 만들어 노래를 하다가 성대결절에 걸렸었는데요. 그 목소리가 마담 흉에 쓰일 줄은 몰랐어요.
배우나 성우로 일하면서 저의 에고(ego)를 많이 깼어요. 나를 버리는 법을 알게 된 게 정말 귀해요. 오랫동안 터프한 로커 행세만 했는데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끄집어내게 된 것도 소중한 경험들이죠. 배우, 가수, 성우로서 경험이 서로서로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니 전 진짜 복받은 거죠.
뮤지컬은 노래, 춤, 연기가 결합된 종합예술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을 꼽는다면요.
혜원 : 아무래도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겠죠. 첫사랑 같은 느낌도 들어요. 뮤지컬 경험이 일천한데 연출 선생님이 저를 거의 사자가 육아하듯 훈련시키셨어요. 뭔가를 그렇게 열심히 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였죠. 살기 위해 매달렸고, 저의 부족함을 배우고 혹독하게 훈련한 3년이었어요.
그래도 결국 ‘본업’은 뷰렛이군요. 20년 넘게 뷰렛을 끌고 온 원동력이 있다면요?
혜원 : 본능인 것 같아요. 먹고살 수 없어 음악을 그만둔다는 얘기도 있지만 저한테는 음악이 그냥 제 삶이자 밥이거든요. 밥 먹는 일이 늘 즐겁지만은 않잖아요. 가끔씩은 진짜 오늘 정말 맛있었다 하는 날도 있지만 오늘은 그냥 맛없는 걸로 배만 채웠네 하는 날도 있고 오늘은 귀찮아 안 먹을래 하는 날도 있죠.
하지만 죽는 날까지 밥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어렸을 때는 기대가 많았어요. 음악으로 이루고 싶은 것들,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기대요. 기대만 있으면 지치기 마련이죠. 지금도 기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음악을 좋아하는 건 내 자유잖아요. 원함은 있지만 원망하는 맘은 가지지 않게 됐어요. 왜냐하면 전 어릴 때랑 똑같거든요.
유치원 때 공주에 관한 노래를 지어서 부르고,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가 전학 가면 슬픈 마음을 동요로 만들어 부르며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 음악 그 자체를 다만 사랑했던 그때처럼 하루하루를 살려고 해요.
어린 시절에 동요 멜로디를 짓던 것처럼 요즘에도 작곡 행위가 일상인가요?
혜원 : 네. 저는 약간 공무원처럼 살아요. 하루의 루틴, 일주일의 루틴을 군인처럼 정해두고요. 이를테면 매주 토요일은 데모 작업을 하는 날이죠. 그러다 보니 쟁여둔 노래가 엄청나게 많아요. 2027년, 25주년 때는 저의 창고를 크게 털어서 박스세트 같은 걸 만들어볼까도 생각 중이에요.
내친김에 디비딥 밴드 시절 때부터 불렀지만 음원으로는 발표하지 않은 곡들도 넣고, 게임 등 OST 참여 곡도 담고, 미공개 데모 곡들도 듬뿍 담아서 팬들을 위한 선물 상자 같은 앨범을 내볼까 하는 구상도 하고 있어요.
최근에 중국어, 영어 버전의 곡을 낸 이유가 궁금합니다.
혜원 : 해외 진출에 야망을 가지신 소속사 대표님의 푸시 때문이에요.(웃음) 중국어는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재밌어요. ‘Rock Star’를 녹음할 때 발음이 좋다고 칭찬도 받았답니다. 올가을 대만 타이중에서 열리는 ‘스프링 웨이브’ 페스티벌에서 현지 인기 가수 겸 배우인 펑샤오웨(鳳小岳)와 무대도 꾸미고 그걸 계기로 내년에 함께 대만 프로모션 활동을 할 계획도 세우고 있어요.
TMI인데 제가 사실 다음 생에는 쿵푸 유단자가 되는 게 꿈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쿵푸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또 영화 ‘동방불패’에 나오는 린칭샤(林青霞) 같은 도포 자락 날리는 고전적 미인들도 너무 좋아했답니다. 영어 노래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해외 팬들이 저를 검색했을 때 친숙한 제목과 가사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저의 옛 노래들을 업데이트된 편곡과 사운드로 들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답니다.
음악 외의 일상은 어떤가요.
혜원 : 매일 2시간씩 운동을 해요. 영양 식단도 챙기면서 거의 ‘태릉인’처럼 먹고요. 사실 운동을 시작한 지 3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정말 느끼는 게 크답니다. 프리랜서 음악가들에게는 이런 루틴이 정신 건강도 잡아줄 수 있는 필수 요소라는 걸 절감해요. 후배 음악가분들께도 적극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또, 일정이 없는 날은 오후 2시부터 9시까지 틀어박혀 피아노를 쳐요. 요즘은 J. S.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치는데 29번까지 진도가 나갔죠. 임윤찬의 야성미를 좋아합니다.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언젠가는 제 피아노 롤모델들이 즐겨 연주하는 그랜드 피아노, 스타인웨이 D274 모델을 사는 게 꿈이에요!
내년에 낼 정규 4집은 어떤 앨범이 될까요. 살짝만 먼저 귀띔해 주신다면요.
혜원 : 1번 곡이 아니라 3번 곡으로 시작할 거예요. 트랙 넘버는 곧 월(月)을 뜻하죠. 그러니까 3, 4, 5월의 봄으로 시작해 3곡씩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을 지나갈 거고 마지막 곡인 2번 곡이 끝난 뒤 반복 재생한다면 계절이 순환하듯 끝없이 흘러가는 느낌의 앨범을 만들려 해요. 희망찬 봄, 정열의 여름, 달밤의 광기를 담은 가을, 고난의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일종의 콘셉트 앨범입니다.
뮤지컬 느낌의 곡부터 스트레이트한 모던 록, 일렉트로닉 댄스, 피아노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로 드라마틱 하게 전개해 나갈 생각이에요. 10년 만의 정규앨범인 만큼 이를 갈듯 준비하고 있어요. 12첩 한상차림 코스처럼요.
인터뷰 | 임희윤 (음악평론가)
사진 | 민희수 (2Fyou)
기획 | GROI / 구자영
디자인 | 김예지
에디터 | 이서인 이동석
발행 | 킨디라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