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선 순간들
밴드 단편선 순간들은 나오자마자 일을 저질러 버렸다. 2024년 결성돼 그해 낸 1집 '음악만세'로 지난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음반'을 수상한 것이다. 2025년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등의 무대에 서며 그들은 폭발적 연주와 광기 어린 무대 매너로 명불허전임을 증명했다.
새해가 밝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월 초의 추운 날,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다섯 명의 멤버를 만났다.
'음악만세'의 처절한 선언보다는 대학 동아리 모임의 수다 타임처럼, 라운드 테이블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 다소 수줍지만 진심 어린 음악 이야기를 나눴다.
팝과 록과 클래식과 엑스재팬과 트와이스와 빌 에번스가 난무하는 다채로운 음악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단편선 순간들의 미래는 오리무중임을 짐작했다. 앞날이 뿌예서 더 기대가 되는 음악인들이다. 그 보드라운 아스라함 속에는 낯선 가시라든가 꿈결 같은 멜로디 따위가 도사리고 있으리라는 걸 미뤄 알 수 있기에.
- 임희윤 음악평론가
멤버들이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현우 : 2004년, 교회에서 친구 따라 베이스를 배우면서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셔서 기분이 좋아 전공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쭉 베이스를 쳤네요.
장미 : 기타는 중1 때 클래식 기타를 취미로 배우며 시작했고요. 드럼 치는 친구의 학원에 따라갔다가 전기기타를 알게 되고, 그 친구가 들려주는 엑스재팬(X-Japan), 메탈리카(Metallica)를 들으며 호기심을 갖게 됐죠. 그러다가 당대의 리듬 게임 '비트매니아' 'DDR' 같은 걸 접하면서 미디(MIDI)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죠. 그런 게임에 관한 동아리 운영자를 하다 동아리 회원인 단편선을 만난 게 고1 때고요. 같이 수유역 등지의 유명한 오락실들을 '도장 깨기' 하며 다니다가 블러(Blur)의 'Song 2' 같은 곡을 함께 연주해 보기도 했죠.
단편선 : 저는 원래 운동을 못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걸 좋아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오락실 가는 것과 만화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투여했어요. DDR과 비트매니아를 매개로 만난 동아리 친구들은 저마다 작곡에 관심이 많았고, 저도 테크노 등을 만들다가 케이블 음악 채널에서 노브레인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잔잔한 충격에도 빠졌죠. 게임으로 도장 깨기를 하다 게임하는 재미가 시들해질 즈음에 한국 1세대 인디 음악을 들으며 밴드 음악에 빠져든 거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나 지금 '단편선 순간들'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박장미예요.
보람 : 부모님께서 슈퍼마켓을 하셨는데 그 건물 2층에 피아노 학원이 있었어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재미가 없어져서 아홉 살 무렵부터는 제 맘대로 변주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H.O.T. 등 유영진이 주도한 SM 음악을 듣다가 엑스재팬,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 빌 에번스(Bill Evans)를 차례로 들으면서 음악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계속 온 느낌이에요.
재준 : 원래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 밴드부가 생겨서 보컬 오디션을 보는데, 오디션에서 노래를 하는 바로 그 도중에 딱 변성기가 왔어요. 아버지가 마침 교회에서 드럼을 치셨는데 저도 따라치게 되고, 또 영업직이던 아버지가 다니셨던 클럽 '올 댓 재즈'를 통해서 재즈도 접하고, EBS '스페이스 공감'도 보고 저 역시 엑스재팬도 좋아하면서 드러머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의외로 저희, 엑스재팬이란 공통 키워드가 있네요.
'순간들'의 결성 계기가 궁금합니다.
단편선 : 제가 하고 있던 단편선과 선원들이란 밴드가 2017년 해산하게 되면서 저는 생활인으로서 살게 됐어요. 회사를 다니기도 하고 천용성, 전유동 등을 만나면서 의도치 않았지만 작은 프로듀싱도 하게 되고요. 그 이후로 제 작업보다는 다른 아티스트의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어요. 여기 있는 보람도 보일이라는 앰비언트 팝 뮤지션 작업 때 만났고, 재준과 현우도 전유동의 음반들을 하면서 만났고요. 어느 시점부터 다시 저의 음악을 하고 싶어졌고, 그간 만난 인상적인 연주자들을 모으게 된 거예요. 2024년 1월, 순간들이란 이름을 지으면서 시작이 됐죠.

그룹명이 '단편선과 순간들'이 아니라 '단편선 순간들'인 것도 은근히 특이해요. 강병철과 삼태기, 닉 케이브 앤드 더 배드시즈처럼 리더 이름 뒤에 'and'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단편선 : 그룹명에 대해서는, 서로 너무 구속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처음엔 뭔가 '임시 정부' 같은 걸 생각하다가 어느 날 '순간들'이란 이름을 떠올렸는데 당시엔 이렇게까지 오래 이어지고 계속해나갈 프로젝트가 되리라곤 생각 못 했죠. 저희 곡을 보면 조사 등이 생략돼 있는 경우가 무척 많거든요. '숨 춤 물 혀' '불 천 삶 핵' 처럼요. 영화로 치면 점프 컷인데, 정의 내리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재준 : 순간들, 맘에 들었어요. 결국 우리는 순간을 사는 거잖아요. 그 순간들이 모여가지고 시간이 되고 그 시간이 나의 역사가 되고 인생이 되는 거니까. 우리가 순간을 사는데 대충 살지 않잖아요.

혹시 단편선 순간들을 하면서 겪은 최고의 순간들이 있다면요.
장미 : 1집 '음악만세' 녹음 때요. 저는 레코딩을 앞두고 가장 늦게 합류한 멤버였어요. 제 나름대로 밴드를 오래 했지만 펑크 록 등 주로 기타가 위주인 팀들이었어요. 피아노가 있는 밴드를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팀에서는 피아노와 베이스가 화성과 골격을 어느정도 다 완성한 상태여서 나의 기타로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데모 음원을 받아서 제 나름대로 편곡을 해 갔는데 단편선이 '쓸 라인이 한 개도 없다'고 해서 심각하게 대책 회의를 하기도 했죠. 타이틀곡 '음악만세'를 녹음할 땐 기타리스트 특유의 손버릇으로 처음엔 비브라토를 넣었는데 그걸 담백하게 빼느라 혼났어요. 결국 수많은 테이크 끝에 완성한 것을 듣고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죠. 부서지는 경험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현우 : 저는 두 가지 순간이 기억나요. 첫 번째는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을 때. 해가 쨍쨍하고 너무 더웠는데, 관객들이 '음악만세' '싱글은 앨범이 아니다' 같은 문구를 담아 제작한 깃발을 저희를 위해 흔들어주고 있는 게 보였어요. 두 번째는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때 '음악만세'의 클라이맥스에서 장미 형이 깃발을 휘두르며 미친 듯 무대 위를 달려가던 장면. 저는 할 수 없는 행동이고 짜릿했고 대리 만족이 있었어요.
재준 : 저도 DMZ 때요. 세션으로 나가본 적은 있어도 정규 멤버로 페스티벌에 나가는 건 저로선 처음이었고, 제 마음대로 친 드럼 비트에 맞춰서 사람들이 춤추고 반응하는 걸 보면서, 그동안 재즈 보컬, 재즈 드럼 등 다양한 음악을 하면서 걸어온 길이 결국 이걸 위한 거였나 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아요.
보람 : 무대에 있을 때 멤버들을 한 번 이렇게 쭉 보고 관객들의 얼굴을 쭉 보는 순간이 좋아요.
단편선 : 무대 위에서 펼쳐내는 이 극이, 이 판이 한껏 달아오르면 맛이 가는 순간이 와요. 너무 힘들고 숨이 가쁘지만 그때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죠. 어차피 어떻게 가든 어떻게든 된다는 믿음이 우리 사이에 다 있으니까, 그러면서 아무 데로나 튀어나가는 순간들. 그 순간들에 빠져들 때가 참 좋아요.

'음악만세' 앨범의 처음과 마지막을 각각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이 장식해요. 클래식곡의 변주를 처음과 끝에 배치한 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단편선 : 이제 와서 말씀드리자면 사실 열등감의 발로라고 생각해요. 저는 클래식도 좋아하고 록 음악도 좋아해요. 고급스럽다고 평가받는 클래식만큼이나 페이브먼트(Pavement) 같은 로파이의 밴드 음악도 너무 좋아요. 음반의 첫 곡은 그 음반의 성격을 예고하는 것이고 그것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음악만세'의 첫 곡 'Land of Hope and Glory (and The Things) (Edward Elgar)'는 '그냥 다 깡그리 무시하고 시작할게요'라는 선언에 가깝죠. '저는 클래식도 좋아하는데 그게 꼭 고급이라서 좋아하는 건 아니랍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죠'라고요.
마지막에 변주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은 제게는 매우 캐치한 곡으로 느껴져요. 팝 음악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요. 원곡이 가진 오라를 다 걷어내고 심플하게, 밴드답게 연주해 봤어요. 9번 곡 '음악만세'에서 시끄럽게 깨부순 다음, 마지막에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하면서 우롱차 한 잔 마시는 느낌도 주고 싶었고요.
'음악만세' 앨범 제작을 위해서 연주에 있어 기존과 다르게 접근한 부분이 있다면요?
단편선 : 전 이 앨범 준비하면서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는데요. 크게 소리 지르는 건 많이 해봤는데 작게 소리 내는 걸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이를테면 수록곡 가운데 '오늘보다 더 기쁜 날은 남은 생에 많지 않을 것이다'는 정말 보드랍게 불러야 되거든요. 어떻게 하면 소리를 작게 낼 수 있는지를 공부했어요.
재준 : 춤추는 걸 굉장히 많이 상상했어요. 이 곡에서는 듣는 이로 하여금 이런 춤을 추게 하고 싶고, 그 춤을 추게 하려면 리듬을 어떻게 가져가야 된다는 식의 생각요. '오늘보다 더 기쁜 날은 남은 생에 많지 않을 것이다'는 편선 형이 트와이스 같은 케이팝 느낌을 주문했었고, '음악만세'는 스쿨 밴드 같은 느낌을 담으려 했어요. 관객이 막춤 같은 걸 추는 걸 상상하기도 했죠.
보람 : 예전에는 재즈나 앰비언트 쪽 음악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저는 무드를 중시하는 연주자이고 그러려면 흘러가는 선이 자연스러워야 하며 그 안에 서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곤 했죠. 그런데 '순간들'에서 처음 해본 것은 피아노를 때리는 일이에요. 어떻게 해야 피아노로 더 폭력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가끔 멍이 들 때도 있어요.
현우 : 예전에는 리듬, 톤 등이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변박이 있는 곡을 소화하면서, 정확히 쳤다고 생각하는데 들어보니 이상하게 쳐지더라고요. 이제는 '베이스가 음악 안에서 자연스럽게 들려야 한다, 자연스럽게 들려야 멋있는 지점이 생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번 작업을 통해서 기술적인 것 말고 음악처럼 들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 깨닫게 됐어요.
장미 : 저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가 전혀 해보지 못한 포맷의 음악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를 느꼈어요. 앨범이 나오고 난 뒤에야 '나는 이 밴드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야'를 깨달았던 경우죠.
음반의 전체적인 사운드나 음의 결이란 측면에선 어떻게 접근했나요.
단편선 : 저희 밴드의 첫 싱글 '독립'의 믹스가 끝난 뒤 천학주 엔지니어와 많은 의견을 나눴어요. 어디에다 사운드의 기준을 맞춰야 할지 혼란스럽다고 하더라고요. 차제에 스탠더드에 맞추지 말고 다르게 가보자고 합의했죠. 당시에 다른 밴드나 앨범의 사운드는 낮고 풍성하고 꽉 차는 식이 유행이었어요. 이를테면 멘 아이 트러스트(Men I Trust) 같은 밴드의 음악을 들어보면 낮고 차분해서 무드 음악처럼 들리거든요. 그런데 우린 되레 드럼 톤을 다 조금씩 높게 잡아가보자고 했죠. 북을 때린다는 느낌으로, 더 퍼커시브하고 달뜬 느낌으로. 놀이처럼 들리길 바랐죠. 가벼운 사람의 캐릭터를 드럼 사운드로 잡았던 것 같아요.
멤버들이 요즘 즐겨듣는 음악도 알려주세요.
단편선 : 제가 최근 하루 동안 들은 음반은요. 벨 앤드 세바스천(Bell and Sebastian)의 'If You're Feeling Sinister'. 그리고 오페스(Opeth)와 이스턴 유스(Eastern Youth)....
장미 : 저는 요즘 뒤늦게 '귀멸의 칼날'을 열심히 보고 있다 보니 1기 오프닝 곡 '홍련화'를 거의 매일 한 열 번씩은 듣는 것 같고, 엊그제 빈티지 옷과 액세서리를 보러간 숍의 풍경이 어쩐지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같아서 오랜만에 그들의 1집을 통으로 듣다 'No future for you'라는 가사에 꽂혀서 'God Save the Queen'이란 곡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보람 : 륀 트레 벨(Lune Très Belle), 그리고 여기 멤버가 함께 하는 팀 앙브루아즈(Ambroise)도 최근에 많이 들었어요. 아, 비요크(Björk)의 'Debut' 앨범도 최근 에너지를 올리기 위해서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치헤이 하타케야마(Chihei Hatakeyama)라는 사람의 앰비언트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재준 : 저는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 본이베어(Bon Iver), 빌 에번스. 빌 에번스는 특히 'Peace Piece'를 많이 들었습니다.
현우 : 디앤젤로(D'Angelo)의 'Black Messiah'를 2, 3년째 자주 듣고 있고요. 특히 수록곡 중에 'Really Love'를 너무 좋아합니다. 또, 제가 연주하는 음악과 좋아하는 음악이 좀 달라서, 스무드 재즈 하는 브라이언 심슨(Brian Simpson)의 곡들에서 베이스 연주를 즐겨 들어요. 그리고 최근에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Ramble On'이란 곡도 자주 들었고요. 왠지 모르게 요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음악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서로 하나도 겹치는 게 없는 게 놀랍네요. 굳이 따지자면 학창 시절 들었던 엑스재팬이란 공통분모 정도.... 혹시 올해의 계획과 꿈이 있다면 궁금합니다.
단편선 : 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것들이 되기를 항상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도 하고 있고요. 밴드로서 헛된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2집을 내자는 데는 모두가 협의를 했습니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우리도, 듣는 사람들도 만족할 만한, 그러나 '음악만세'와는 다른 음반을 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왕 엎질러진 거, 조금 더 저질러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인터뷰 | 임희윤 (음악평론가) 사진 | 민희수 (2Fyou) 기획 | GROI / 구자영
디자인 | 김예지 에디터 | 이서인 이동석 발행 | 킨디라운지




